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- 한강

 

문학과지성 시인선 438

그러나 희망은 병균 같았다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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새벽에 들은 노래 3


나는 지금

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

이미 꽃잎 진

꽃대궁

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


누군가는

목을 매달았다 하고

누군가는

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

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


새벽은

푸르고

희끗한 나무들은

속까지 얼진 않았다


고개를 들고 나는

찬 불덩이 같은 해가

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

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


다시

견디기 힘든

달이 뜬다


다시

아문 데가

벌어진다


이렇게 한 계절

더 피 흘려도 좋다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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무제


무엇인가 희끄무레한 것이 떠 있다 함께 걸어간다 흘러간다 지워지지 않는다 좀처럼, 뿌리쳐지지 않는다 끈덕진 녀석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떠나도 떠나지지 않는다 나는 달아난다 더 달아날 수 없을 때까지, 더 달아날 수 없어 돌아서서 움켜쥐려 한다 움킬 수 없다 두 팔 휘젓는다 움킬 수 없다 그러나 이따금

내가 홀로 울 때면

내 손금을 따라 조용히,

떨며 고여 있다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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유월


그러나 희망은 병균 같았다

유채꽃 만발하던 뒤안길에는

빗발이 쓰러뜨린 풀잎, 풀잎들 몸

못 일으키고

얼얼한 것은 가슴만이 아니었다

발바닥만이 아니었다

밤새 앓아 정든 胃장도 아니었다

무엇이 나를 걷게 했는가, 무엇이

내 발에 신을 신기고

등을 떠밀고

맥없이 엎어진 나를

일으켜 세웠는가 깨무는

혀끝을 감싸주었는가

비틀거리는 것은 햇빛이 아니었다,

아름다워라 山川, 빛나는

물살도 아니었다

무엇이 내 속에 앓고 있는가, 무엇이 끝끝내

떠나지 않는가 내 몸은

숙주이니, 병들 대로 병들면

떠나려는가

발을 멈추면

휘청거려도 내 발 대지에 묶어줄

너, 홀씨 흔들리는 꽃들 있었다

거기 피어 있었다

살아라, 살아서

살아 있음을 말하라

나는 귀를 막았지만

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귀로

막을 수 있는 노래가

아니었다

뭐가 좋다고 이 짓을 하는 건가 현재의 가혹함은 앞으로는 더욱 오래 지속된 가혹함으로 악화됨을 확신하고 다른 빛으로 몸을 뒤집었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어두웠었나 후회한다 혹은 구덩이 속에서 발악하는 인간들을 보며 안주하는 관음증의 연속